기원전부터 심리학에 대한 연구는 계속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심리학'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현대 심리학의 정립 이전의 심리학은 그 경계가 모호하였으며 철학자들이 다루는 분야로 간주 되어 왔다. 일찍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론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에 대한 논쟁은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는 유명한 심신 문제에 있어서 이원론을 주장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별개의 실체임을 주장하여 마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중시하는 현대 심리학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형이상학 철학자 볼프가 그의 저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을 발행함으로써 조건을 사용한 실험은 일반적인 심리 실험의 방법이 되었다. 디드로는 이러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의 다른점에 대해 그의 백과사전에 기술하였고 비상에 의해 프랑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파티마 칼리 파조의 선구적인 과학자 이쁜 알 하이 탐은 1010년 발간된 그의 광학에서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시각을 기술하고 있다. 독일 스콜라 철학자 루돌프 괴켈은 159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조건을 사용한 심리 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보다 60년 전 크로아티아의 휴머니스트 마르코 마루 읽은 조건을 이용한 그의 업무 목록을 남겼으나 그 내용은 소실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기존 철학의 한 분야로 취급되던 심리학은 점차 철학에서 나뉘어져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아 나가게 되었다. 그 시작은 1879년,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빌헬름 분트가 라이프치히 대학에 첫 심리학 연구소인 정신물리 실험실을 만들면서부터였다. 분트는 자신을 '심리학자'라고 했으며, 심리학이 독립된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심리학을 직접경험 학문이라 정의했으며, 연구 방법론으로는 '내성법'을 주장하였다.
근대 이전에 마음이란 신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마음은 영혼의 표현이라고 했으며, 물질이 아니므로 신체의 일부분으로 보지 않았고 물질이 아닌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리학을 철학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으나 여러 실험과 연구를 통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게 되자 심리학은 체계적이며 과학적으로 연구가 가능한 하나의 학문으로 취급되기 위해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심리학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실험이 이어졌는데, 독일의 에빙하우스가 베를린 대학에서 기억과 망각에 대한 선구적인 실험을 진행하여 1885년 망각곡선 가설과 간격 효과에 대해 발표했다. 1890년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당시 심리학에서 다루는 주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심리학의 원리라는 책을 저술, 발간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파블로프는 유명한 고전적 조건형성 실험을 통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다.
형태주의 심리학은 1910년에서 1912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독일 심리학자 베르트하이머가 자신의 논문 운동지각에 관한 실험연구를 통해 일상적인 지각 현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시기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립에는 물리학자인 마크, 철학자 에렌펠스, 칼 슈툼프의 세 사람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르는 특정한 공간과 형태는 더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에렌펠스는 "형태질"의 존재를 말하며 특정한 경험의 질은 개인적 감각 요소 이상임을 역설했다. 슈툼프는 분트와의 논쟁 과정에서 숙달된 청자들이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보다 음악적 관찰자로서 더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이후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다.
레빈은 여러 가지 경력을 지닌 이색적인 심리학자였다. 그는 사회심리, 발달 심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간주한다. 그의 장이론은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하며, 이에 따르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과 인간 모두이다. 레빈은 이를 B=f(P,S)라 나타냈다. 또한 그는 위상기하학을 사용하여 자신의 개념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외에도 지도력 연구, 개별 사례 연구 등의 사례를 남겼다.
베르트하이머는 가현운동에 주목하였으며, 여기서 실제로는 없었지만 움직임을 '파이 운동'이라 불렀다. 이를 토대로 그는 "부분 과정 자체가 전체의 고유한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시작을 연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베르트하이머의 피험자였던 코프카와 호출로 역시 게슈탈트 심리학자였으며, 모두 슈툼프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코프카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미국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호출로는 이후 게슈탈트 이론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특히 게슈탈트 현상이 어떤 원리로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으며, 이 연구들로 밝혀진 것들을 게슈탈트 체제화 원리라 이름 붙여 널리 알렸다. 이 원리는 근접성, 유사성, 좋은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1890년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주창하여 독자적인 심리학 영역을 이루어냈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무의식과 의식, 자아와 초자아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간 행동의 기반을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보았다. 이 중 리비도는 초기 프로이트, 타나토스는 2차 대전을 경험한 이후의 프로이트가 주장한 개념이다. 정신분석이 심리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의식'의 발견, 그리고 심적 결정론이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의 과학적 지위에 대한 비평보다는 그 이론 자체가 적용되지 않은 부분들과 문제점, 그리고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반발감 등으로 영향력이 작아져서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이 차지하는 위치는 높지 않으며, 그들은 미국 심리학회 기관 중 가장 큰 기관인 APA의 10% 미만,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기관인 APS의 5% 미만을 차지한다. 특히 실험심리학자들 중 정신분석학을 주장하는 학자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 정신분석학은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그 역사가 이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정신분석은 문학비평 등 심리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관심을 받는 추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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